리오넬 조스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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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오넬 조스팽은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1937년 파리 근교 뫼동에서 태어났다. 파리정치대학과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하고 외무부에서 근무하다가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1971년 사회당에 입당하여 프랑수아 미테랑의 측근이 되었으며,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주 35시간 노동제 도입, 국영 기업 매각 등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정책을 추진했다. 2002년 대선에서 극우 정당 후보에게 밀려 3위를 기록하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저술 활동을 하였고, 2012년에는 프랑스 정치 생활의 도덕성 및 윤리에 관한 위원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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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넬 조스팽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리오넬 조스팽 |
출생일 | 1937년 7월 12일 |
출생지 | 프랑스, 일드프랑스, 오드센주, 메우동 |
![]() | |
경력 | |
직업 | 활동가 공무원 |
정치 경력 | |
임기 시작 | 1997년 6월 2일 |
임기 종료 | 2002년 5월 6일 |
대통령 | 자크 시라크 |
전임자 | 알랭 쥐페 |
후임자 | 장피에르 라파랭 |
임기 시작 | 1995년 10월 14일 |
임기 종료 | 1997년 6월 2일 |
전임자 | 앙리 에마뉘엘리 |
후임자 | 프랑수아 올랑드 |
임기 시작 | 1981년 1월 24일 |
임기 종료 | 1988년 5월 14일 |
전임자 | 프랑수아 미테랑 |
후임자 | 피에르 모루아 |
임기 시작 | 1988년 5월 12일 |
임기 종료 | 1992년 4월 2일 |
총리 | 미셸 로카르 에디트 크레송 |
전임자 | :fr:René Monory |
후임자 | 자크 랑 |
임기 시작 | 1988년 5월 12일 |
임기 종료 | 1991년 5월 16일 |
총리 | 미셸 로카르 |
전임자 | 알랭 칼마 |
후임자 | 프레데리크 브레딘 |
임기 시작 | 2015년 1월 6일 |
임기 종료 | 2019년 3월 11일 |
임명자 | 클로드 바르톨론 |
위원장 | 장루이 드브레 로랑 파비우스 |
전임자 | 자크 바로 |
후임자 | 알랭 쥐페 |
학력 | |
모교 | 파리 정치 대학 프랑스 국립 행정학교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엘리자베스 다넨뮐러 (이혼) 실비안 아가친스키 |
자녀 | 에바, 위고 |
정당 | 프랑스 사회당 |
기타 정당 | 국제공산주의조직 (과거) |
2. 생애
1937년 프랑스 뫼동에서 태어나 파리정치대학과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했다. 젊은 시절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1971년 사회당에 입당하여 프랑수아 미테랑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1981년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사회당 제1서기를 맡아 당을 이끌었고, 1988년 미테랑 재선 후에는 교육스포츠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2년 내각에서 물러나고 1993년 총선에서 낙선하는 등 정치적 시련을 겪었으나, 1995년 대선에 사회당 후보로 출마하여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며 재기했다. 비록 결선 투표에서 자크 시라크에게 패배했지만, 이를 발판으로 1997년 총선에서 사회당의 승리를 이끌며 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로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동거 정부를 구성하여 2002년까지 재임했으며, 이 기간 동안 주 35시간 노동제 도입 등 주요 사회 개혁을 추진하며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는 예상과 달리 1차 투표에서 극우 정당 후보인 장마리 르 펜에게 밀려 3위를 기록, 결선 진출에 실패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았다. 이 패배 직후 조스팽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저술 활동 등에 전념했으며, 2007년 대선 출마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 불출마했다.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 의해 정치 생활의 도덕성 및 윤리에 관한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잠시 공직에 복귀하기도 했다.
2. 1. 어린 시절
리오넬 로베르 조스팽(Lionel Robert Jospin프랑스어)은 1937년 7월 12일[1] 혹은 7월 24일[39] 프랑스 파리 근교 뫼동(오드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인 로베르 조스팽(Robert Jospin), 어머니는 미레이유 댕디외 알리에트(Mireille Dandieu Aliette)이며, 개신교 가정에서 자랐다.[1] 그의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자 트로츠키주의자였고, 조스팽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학창 시절부터 트로츠키주의를 지지하고 관련 운동에 참여했다.[39]장송드사이이 고등학교(Lycée Janson-de-Sailly)를 졸업하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과 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ÉNA)에서 수학했다.[1] 그는 프랑스전국대학생연합(Union Nationale des Étudiants de France, UNEF)에서 활동하며 당시 진행 중이던 알제리 전쟁(1954~1962)에 항의하는 목소리를 냈다.[1] 이후 독일 트리어에서 장갑차 훈련 담당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1]
2. 2. 정치 경력
1971년 새롭게 개편된 사회당에 입당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제1서기였던 프랑수아 미테랑의 신임을 얻어 당내 주요 직책을 맡았다. 1981년 대선에서 미테랑이 승리하자, 조스팽은 사회당 제1서기직을 이어받아 1988년까지 당을 이끌었다.1988년 미테랑이 재선에 성공하고 이어진 총선에서도 사회당이 승리하면서, 조스팽은 교육스포츠장관으로 입각했다. 장관 재임 중 여러 개혁을 시도했으나 어려움을 겪었으며[40], 특히 이슬람교도의 학교 내 베일 착용 문제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당내 경쟁자들과의 갈등 및 미테랑 대통령과의 정책적 이견으로 인해 1992년 개각 때 내각에서 제외되었고, 1993년 총선에서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패배하는 시련을 겪었다.
1995년 대선을 앞두고 사회당 내 경쟁자들이 부패 스캔들로 주춤한 사이, 조스팽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다소 생소한 학자풍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1차 투표에서 당시 유력 후보였던 자크 시라크와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41][42] 그러나 결선 투표에서는 시라크에게 47% 대 53%로 패배했다.[43] 대선 이후 1995년 다시 사회당 제1서기에 취임했다.
1997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승리하면서 조스팽은 총리로 임명되어, 2002년까지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함께 프랑스 역사상 세 번째 동거 정부를 이끌었다. (자세한 내용은 총리 재임 (1997-2002) 문단 참고)

총리 재임 중 국제 문제에서는 비교적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2000년에는 시라크 대통령보다 더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군인과 민간인에 대한 테러 공격"을 비판했다. 같은 해 2월 26일, 팔레스타인의 비르자이트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일부 팔레스타인 학생들로부터 돌을 맞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32]
2002년 대선에 다시 도전했으나, 1차 투표에서 예상외로 극우 정당 후보인 장마리 르 펜에게 밀려 3위를 기록하며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 충격적인 패배 이후 조스팽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자세한 내용은 2002년 대선 패배와 정계 은퇴 문단 참고)
2. 2. 1. 총리 재임 (1997-2002)


대선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사회당 제1서기에 재취임한 조스팽은 1997년 조기 총선에서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정국 혼란에 대한 신임을 묻기 위해 실시한 이 선거에서 사회당은 우파 연합을 누르고 제1당이 되었다.[44][45] 조스팽은 즉시 공산당, 녹색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제3차 동거 정부(코아비타시옹)를 출범시켰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조스팽은 보수파인 시라크 대통령과 때때로 의견 대립을 겪었으나, 기존 좌파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신자유주의 요소를 일부 도입하는 등 유연한 정책 운영을 보였다. 특히 그의 내각은 노동 문제에 주목하여 총선 공약이었던 주 35시간 노동제를 성공적으로 실시했다. 이러한 정책은 때로 사회당의 전통적인 노선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재임 기간 동안 높은 경제 성장률과 낮은 실업률을 기록하며 국민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누렸다.[46] 조스팽은 학자 출신다운 성실하고 고지식한 이미지로 대중적 인기보다는 신뢰를 얻으며 프랑스 국민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는 "다원적 좌파" 노선을 표방하며, 당시 유럽의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권들, 예를 들어 영국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이나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신중도 노선과는 차별화된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조스팽 내각의 주요 업적으로는 국내외에서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주 35시간 노동법의 제정 및 시행과 시민 연대 협약(PACS)의 도입을 들 수 있다.
내각 구성에 있어서는 "5월 혁명"의 중심인물이었던 소위 "1968년 세대"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자크 랑, 베르나르 쿠슈네르, 마르티느 오브리(자크 들로르의 딸), 엘리자베트 기구,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도미니크 보아네, 크리스티앙 소테르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미셸 로카르나 로랑 파비우스와 같은 당내 실력자들은 배제하여 신선한 내각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다.
=== 조스팽 내각 명단 (1997년 6월 4일) ===
직책 | 성명 |
---|---|
총리 | 리오넬 조스팽 |
외무부 장관 | 위베르 베드린 |
국방부 장관 | 알랭 리샤르 |
내무부 장관 | 장-피에르 슈브네망 |
경제·재정·산업부 장관 |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
고용·연대부 장관 | 마르티느 오브리 |
사법부 장관 | 엘리자베트 기구 |
국립교육·연구·기술부 장관 | 클로드 알레그르 |
문화·커뮤니케이션부 장관 | 카트린 트로트망 |
농림부 장관 | 루이 르 팽세크 |
환경·지역계획부 장관 | 도미니크 보아네 |
청소년·체육부 장관 | 마리-조르주 뷔페 |
교통·주택·장비부 장관 | 장-클로드 게이소 |
의회 관계부 장관 | 다니엘 발랑 |
공무원·국가개혁·분권화부 장관 | 에밀 쭈카렐리 |
여성 담당 국무장관 | 니콜 페리 |
=== 내각 변동 사항 ===
날짜 | 변경 내용 |
---|---|
1998년 10월 20일 | 장 글라바니가 르 팽세크의 뒤를 이어 농림부 장관에 취임. |
1999년 11월 2일 | 크리스티앙 소터가 스트로스-칸의 뒤를 이어 경제·재정·산업부 장관에 취임. |
2000년 3월 28일 | 로랑 파비우스가 소터의 뒤를 이어 경제·재정·산업부 장관에 취임. 자크 랑이 알레그르의 뒤를 이어 국립교육부 장관에, 로제-제라르 슈바르첸베르크가 연구·기술부 장관에 취임. 카트린 타스카가 트로트망의 뒤를 이어 문화·커뮤니케이션부 장관에 취임. 미셸 사팽이 쭈카렐리의 뒤를 이어 공무원·국가개혁부 장관에 취임. |
2000년 8월 29일 | 다니엘 발랑이 슈브네망의 뒤를 이어 내무부 장관에 취임. 장-자크 퀘이랑이 발랑의 뒤를 이어 의회 관계부 장관에 취임. |
2000년 10월 18일 | 엘리자베트 기구가 오브리의 뒤를 이어 고용·연대부 장관에 취임. 마릴리스 르브랑슈가 기구의 뒤를 이어 사법부 장관에 취임. |
2001년 7월 10일 | 이브 코셰가 보와네의 뒤를 이어 환경·지역계획부 장관에 취임. |
2002년 2월 25일 | 프랑수아 파트리아가 글라바니의 뒤를 이어 농림부 장관에 취임. |
조스팽은 2002년 대통령 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출마했다. 초반에는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선거 국면이 법과 질서 문제에 집중되면서 정부의 대응이 미흡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는 당시 여러 흉악 범죄 사건에 대한 언론의 집중 보도와 맞물려 조스팽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또한, 극좌 진영에서는 조스팽의 경제 정책이 온건하며 기업과 자유 시장을 중시하는 우파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스팽의 2002년 대선 공약은 주택 접근권을 보편적 권리로 만들고, 기업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 참여를 보장하며, 노인과 장애인 지원을 강화하는 등 강력한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33] 한 분석가는 조스팽의 공약이 '소득 불평등' 해소와 '기회의 평등' 보장을 균형 있게 추구하며, 특히 주택 문제 해결과 교육을 통한 사회 투자를 강조했다고 평가했다.[34]
하지만 1차 투표에서 다수의 좌파 후보들이 난립하여 표가 분산되면서 조스팽의 득표율은 예상보다 낮았다. 결국 현직 대통령 자크 시라크와 극우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에 이어 3위에 그쳐 결선 투표 진출에 실패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았다.[35]
2002년 4월 대선 패배 직후, 조스팽은 즉시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정치 현안에 대해 간헐적으로 발언했는데, 동성결혼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제안된 유럽 헌법에 찬성하는 캠페인을 벌이며 잠시 정치 무대에 복귀하기도 했다.
2006년에는 2007년 대선의 사회당 후보 경선 출마 의사를 내비쳤으나, 세골렌 루아얄의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지자 "당의 분열을 원치 않는다"며 2006년 당내 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36]
2. 2. 2. 2002년 대선 패배와 정계 은퇴
2001년 프랑스 경제가 불경기를 겪으면서 조스팽의 인기도 하락하기 시작했다. 200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그는 이러한 상황을 일부 받아들여 우파적 요소를 공약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논란을 일으켰고, 여러 좌파 후보들이 난립하는 결과를 낳았다.1차 투표 결과, 조스팽은 16.12%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극우 성향의 장마리 르 펜(16.86%)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밀려 3위에 그쳤다. 이로 인해 결선 투표 진출에 실패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했다. 당시 1위는 19.71%를 득표한 현직 대통령 자크 시라크였다. 이 결과, 프랑스 대선 결선은 사상 처음으로 보수(시라크) 대 극우(르 펜) 후보 간의 대결 구도가 되었다.
사전 여론조사에서 시라크와 거의 동등한 지지율을 보였던 조스팽은 패배 결과에 대해 "벼락을 맞은 것 같다"고 표현하며 큰 충격을 나타냈다. 그는 극우 정당 후보가 결선에 진출한 상황이 프랑스와 프랑스의 민주주의에 매우 심각한 위협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5년간의 총리직 수행 결과가 1차 투표 탈락으로 이어진 것에 실망감을 표하며,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으로 우파의 선동과 좌파의 분열을 지적했다.
조스팽은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대선 종료 후 정계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으며, 결선 투표 당일 총리직에서도 물러났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유감과 감사를 표하는 한편, 사회당과 좌파 진영에게는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 다음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를 준비하며 단결하고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후 2005년에 2007년 대선 출마를 목표로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사회당 경선에 나섰으나, 세골렌 루아얄 후보에게 지지율이 밀리자 경선 도중 사퇴하였다.
2. 3. 정계 은퇴 이후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패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나, 2005년부터 저술 활동 등을 시작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사회당이 후보자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조스팽의 출마 가능성에 대한 여러 추측이 제기되었고 여론조사에서도 꾸준히 지지를 받았다.세골렌 루아얄이 좌파 대통령 후보로 부상하자, 2006년 6월 조스팽은 TF1 방송 인터뷰에서 "상황이 허락한다면 출마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같은 해 8월 사회당 하계 세미나에서는 은퇴 후 첫 공식 연설을 통해 출마 선언에 대한 기대를 모았으나, 루아얄 후보를 비판하고 자신의 총리 시절 업적을 강조하는 데 그쳤다. 니콜라 사르코지가 보수파 후보로 유력해지는 가운데 좌파 진영은 결국 루아얄 후보로 단일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조스팽은 9월 29일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2012년 7월 14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조스팽을 프랑스 정치 생활의 도덕성 및 윤리에 관한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이 위원회는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행정부 시절 같은 주제로 설립된 에두아르 발라뒤르 위원회와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일부 인민운동연합 의원들은 로절린 바슐로의 위원회 참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위원회는 해당 연도 말까지 관련 권고안을 제출할 예정이었다.
3. 정치적 성향 및 평가
리오넬 조스팽은 프랑스 사회당 소속 정치인으로, 당내에서는 좌파 성향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의 정치 노선은 단순한 이념만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총리 재임 기간(1997-2002) 동안 그는 "다원적 좌파" 노선을 표방하며 실용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이전의 엄격한 사회주의자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국영 기업을 매각하고 부가가치세, 소득세 및 법인세율을 인하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일부 도입하기도 했다.[11] 이러한 접근은 동시대 영국의 토니 블레어가 내세운 제3의 길이나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신중도 노선과는 차별화되는 프랑스적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구축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의 공존 정부 시기에 조스팽 내각은 다양한 사회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노동 분야에서는 주당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하여 노동 시간 단축을 실현했고,[11] 저임금 근로자를 지원하기 위한 고용 보조금(PPE) 제도를 마련했다.[27] 복지 분야에서는 CMU를 창설하여 저소득층의 의료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으며,[11][15] 이는 조스팽 정부의 핵심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15] 또한 사회적 배제에 맞서기 위한 법률(1998)을 제정하여 RMI 수혜자 지원 강화, 공공 서비스 요금 지원, 주택 지원 확대, 취약계층 노동시장 진입 지원 등 다각적인 빈곤 퇴치 정책을 펼쳤다.[15] 동성 커플을 포함한 두 성인 간의 법적 결합을 인정하는 PACS를 도입하여[12] 사회적 다양성을 포용하는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외에도 사회 전반의 혜택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최저 임금을 인상했으며,[13][14] 유급 부성 휴가를 도입하고[28] 석면 피해자를 위한 보상 기금을 설립하는[17] 등 사회 안전망 강화에 힘썼다.
사회 개혁 측면에서는 정치 영역에서 남녀 동수 후보 공천을 의무화하는 성평등 법을 도입했고,[13] 여성의 권리 신장과 익명 출산 제도 개선,[16]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다양한 정책(의무 시민 교육 도입, 아동 질병 간호 휴가 및 재정 지원, 아동 포르노 및 미성년자 매춘 처벌 강화, 학교 폭력 및 괴롭힘 방지 캠페인, 보육 시설 확충 등)[16][20], 장애인 지원 강화(시설 개선, 고용 서비스 및 대중교통 접근성 향상 등)[17][20], 성적 지향, 나이, 외모 등을 포함한 차별 금지법 강화[21][22] 등 진보적인 조치들을 시행했다.
경제 및 세제 정책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요소 도입과 함께 사회적 형평성을 고려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국영 기업 매각 및 일부 세금 인하[11]와 더불어, 근로자의 건강 보험료 부담을 줄이는 대신 사회보장세(CSG)를 인상하고 임대 및 자본 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했다.[15] 특히 소득세 감면 시 저소득층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가도록 설계했으며,[31]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경제 규정' 법률을 제정했다.[29] 이러한 정책들은 임기 동안 실업률을 90만 명 감소시키고,[11] 가계 구매력을 20여 년 만에 가장 큰 폭(16%)으로 증가시켰으며,[31] 지니 계수 하락으로 나타나는 소득 불평등 완화 효과를 가져왔다.[15]
학자 출신다운 성실하고 고지식한 이미지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일부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오히려 신뢰감을 주며 호감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실용주의 노선, 특히 일부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은 사회당의 전통적인 이념과 상충한다는 이유로 당내 좌파 및 극좌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33]
국제 문제에 있어서 조스팽은 대체로 외교 정책 전면에 나서기를 피했지만, 2000년 중동 문제에 대해서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보다 더 명확하게 친이스라엘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군인 및 민간인 공격을 "테러 공격"으로 규탄했는데,[32] 이 발언은 팔레스타인 측의 반발을 사 비르자이트 대학교 방문 중 학생들로부터 돌을 맞는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32]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선거 국면이 법과 질서 문제에 집중되고 정부의 성과가 미흡하다는 비판과 함께 여러 좌파 후보들의 난립으로 표가 분산되면서 예상외의 결과를 맞았다. 주택 접근권 보장, 기업 이사회 노동자 참여 강화 등 진보적인 공약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33][34] 1차 투표에서 극우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에게 밀려 3위에 그치며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35] 이 충격적인 패배 이후 조스팽은 즉시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동성 결혼 합법화에 반대 의사를 표하거나 유럽 헌법 비준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하는 등 간헐적으로 정치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사회당 경선 출마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으나, 세골렌 루아얄의 지지율이 높아지자 당의 분열을 막겠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36]
4. 가족 관계
조스팽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자랐다.
5. 기타
(내용 없음)
5. 1. 영화 출연
제36회 세자르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2010년 프랑스 영화 Le Nom des gens|전쟁보다 사랑의 관계fra에 본인 역으로 출연했다. 극중에서 "요즘 내 지지자라니 드물다"는 식의 자조적인 대사를 한다.6.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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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1차 득표율 | 1차 득표수 | 2차 득표율 | 2차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81년 프랑스 총선 | 하원의원 (파리 제27선거구) | 7대 | 사회당 | 39.60% | 8,424표 | 54.64% | 12,284표 | 1위 | -- |
1984년 선거 | 유럽의원 (프랑스 선거구) | 2대 | 사회당 | 20.75% | 4,188,875표 | colspan="2" | | 비례대표 1번 | ||
1986년 프랑스 총선 | 하원의원 (파리 선거구) | 8대 | 사회당 | 32.00% | 293,861표 | colspan="2" | | 1위 | -- | |
1988년 프랑스 총선 | 하원의원 (오트가론 제7선거구) | 9대 | 사회당 | 56.76% | 34,774표 | colspan="2" | | 1위 | -- | |
1993년 프랑스 총선 | 하원의원 (오트가론 제7선거구) | 10대 | 사회당 | 29.40% | 19,496표 | 47.83% | 32,387표 | 2위 | 낙선 |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대통령 | 22대 | 사회당 | 23.30% | 7,097,786표 | 47.36% | 14,180,644표 | 2위 | 낙선 |
1997년 프랑스 총선 | 하원의원 (오트가론 제7선거구) | 11대 | 사회당 | 43.71% | 30,868표 | 63.38% | 45,024표 | 1위 | -- |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대통령 | 22대 | 사회당 | 16.18% | 4,610,113표 | colspan="2" | | 3위 | 낙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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